Shipping Room
OPP

OPP 님, 안녕하세요? 귀사의 안녕을 바랍니다.

비록 서면이지만, 소개 먼저 드리는 것이 도리이겠지요. 저희 쉬핑 룸은 Nail-to-Nail을 원칙으로, 미술품 포장·운송·설치에 특화한 기업입니다. 대개 페어, 갤러리, 미술관, 아틀리에, 개인 가정이 주 무대인데요, 국내냐 국외냐 하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용달, 선박, 항공 등 폭넓은 교통로를 아우르며, 통관 등의 제반 절차까지 전담해 전 세계 기관들의 꾸준한 신뢰를 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고객의 재산이자 인류의 유산을 보우한다는 숭고함으로 사업에 임합니다.

이제 질의하신 내용에 답변 드리겠습니다. 남선미, 민동인, 이원호, 한정원 이렇게 네 분의 미술품 운송을 의뢰하신다고요. 출발지는 작가님들의 집과 사무실이 있는 서울과 경기와 충청. 도착지는 “인터넷이 연결된 어느 곳이든”이라고 적어주셨네요. 실례지만 이해가 어렵습니다. “온라인 퍼블리싱”이라는 단어 역시 생소하고요. 작품이 물질이 아닌 데이터라는 건데, 저희로선 난해한 과업입니다.

그러나 당사는 가슴 뛰는 도전을 사랑합니다. 모험이라고 하죠. 웹 페이지 운송. 기꺼이 해보겠습니다. 대신, 디지털 분야에 전문성을 갖춘 귀사가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외부 자문가가 ‘코딩’을 요청하라고 합니다. 운반 가능 상태를 위한 것이니 ‘포장’을 맡겼다고 이해하겠습니다. 당사는 작품을 보관할 카고를 내어드리고, ‘운송’을 책임지겠습니다. 저희의 저명한 브랜드 밸류는 덤이겠고요.

상의할 내용이 많아 보입니다. 회의에서 뵀으면 하는데요, 관련해 준비를 마치고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추신: 참, 그런데 Zoom이 뭔가요?

남선미, 〈Fidget Spinner〉2.1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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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dget Spinner〉는 장난감의 궤적을 평면에 기록한 활동이다. Fidget Spinner의 형태에 집중해 다섯 개의 시퀀스를 만들었다. 하나의 칸은 전에 있었던 칸의 형태를 이어받아 규칙을 더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세 개의 날이 돌아가는 장면을 시퀀스로 구성해놓고 보니 섞여 들어가는 모습이 하나의 플래그 같았다.

〈Fidget Spinner〉 2021년 버전에서는 OPP 전시를 위해 몇 가지 언어로 만들어진 작은 박스형 도슨트가 첨부되었다. 관객은 박스를 클릭하면서, 작가가 동봉한 설명과 함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민동인, 〈독재자의 방〉9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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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를 드높입니다. 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명시 「당신을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도 우리에겐 불온문학일 뿐이지요. 정 향유하고 싶거든 ‘권리’니 ‘자유’니 하는 몹쓸 단어는 집어치워요. 온건한 글귀를 붙여요. 그래요. 이제 볼만하네요. 손본 시는 누리집에 실을 테니, 낮이든 밤이든 가정과 일터에서 겸허히 탐독하세요. 행여 그의 자애로움에 몸 둘 바 모르겠다면, 읽을 뿐 아니라 따라 적어도 괜찮습니다. 누군가 불경한 손을 놀리면 어쩌겠느냐고 괜한 걱정 말아요. 오로지 시만 쓸 수 있게 신경 써 두었지요. 다만, 그 젠장맞을 놈의 애너그램(옮긴 이 주: 단어나 문장을 이루는 문자의 순서를 바꾸어 다른 뜻으로 만드는 놀이. Listen ↔ Silent)이니 뭐니 지껄이며 작문을 한다거나, 체제를 교묘히 모독하는 작자들은 결단코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말이 거칠었다면 미안합니다. 그런데 정말이거든요.

이원호, 〈2016-2020〉10.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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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020〉는 미디어를 빌린 자기소개이다. 작가가 도피처로 삼은 미디어 여섯 편을 꼽은 뒤, 미디어 속 인물들의 도피처를 시각화해 ‘나’의 요소와 번갈아서 보여준다. 여러 장의 이미지가 빠르게 겹쳐지며 하나의 이미지가 완성된다. 이는 미디어가 ‘나’에게 어떻게 스몄는지 설명한다. 관람자는 이의 간접적인 소개로 작가를 유추할 수 있다.

(미디어 여섯 편 - 〈장미의 행렬〉, 〈미쓰홍당무〉, 〈릴리슈슈의 모든 것〉, 〈가면의 고백〉, 〈백만엔걸 스즈코〉, 〈판타스틱 소녀 백서〉)

한정원, 〈없는 작업 생성〉74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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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예술이란 번뜩이는 영감에서 비롯하는 법이다. 우리는 작업을 시작하고 끝마칠 때까지 보다 더 새롭고 놀라운 영감을 떠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고통받는다. 그리고 세상은 그것을 창작의 고통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부른다. 그 아름다운 고통의 시간을 즐기는 이도 분명 있겠지만, 귀찮지 않은가? 피곤하지 않은가? 언제나 제자리에서 기다리는 법이 없는 영감이란 것을 떠올리고자 머리를 부여잡는 시간, 그 끝없는 굴레에서 벗어날 꼼수가 여기 있다. 이 〈없는 작업 생성〉은 말 그대로 세상에 있지도 않은 작업물을 소개하는 텍스트를 생성해 준다. 쓸데없는 양심은 내려놓고 Generate 버튼을 눌러보자. 영감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다.

주의: 〈없는 작업 생성〉은 작업물의 제작에는 관여하지 않는다.